고통보다 깊은 by 폴 투르니에
고통에 대해 쉽게 유익하다고 말하는 부분들을 콕 찝어서 개념을 구분해준 것이 인상적이었다.
고통 자체로 유익한 것이 아닌 반응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고통은 그 자체로는 결코 이로운 것이 아니며, 늘 싸워야 하는 대상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시련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이다.
사건들은 우리에게 고통이나 기쁨을 주지만 우리의 성장은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곧 우리의 내적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물론 이 태도 자체도 우리가 이전에 이룬 모든 성장의 열매다.
위에 인용한 말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 주제를 중심으로 우리가 겪는 고통과 시련에 반응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통 자체로 이로운 것이 아니라는 설명을 하면서 선과 악을 이야기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어느 곳에든 선과 악이 얽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선은 선에서 나오며 악은 악에서 낳는다. 악이 선의 원이 될 수는 없다.
관계와 원인을 혼동하고 고통이 유익한 것이라고 찬양하는 것 말이다.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은 미묘하지만 매우 중요한 일이다.
병이 성장의 원인이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성장의 기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장은 그가 시련에 개인적으로 반응하여 일구어 낸 결과이다.
그 상황에서 그는 퇴보할 수도, 수동적으로 처신하여 침체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통의 시간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흔히 하는 위로의 말이 고통은 위장된 축복이라는 말이다.
어쩌면 좋은 말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의 과정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려울 수도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고통은 무조건 성장을 가져다준다는 막연함도 더욱 무기력해지게 만드는 요소일 수 있다.
책에서 그 부분을 정확히 명시해주면서 고통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기준을 세울 수 있었다. 고통, 상실 그리고 시련의 순간에 살아온 성장과정에서의 치료도 필요하지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원이 어떤 것이 있는지도 중요하다고 배웠다.
질병과 싸우려면 전투의 순간에 의사와 환자가 함께 해야 한다.
둘이 같은 시간에 함께 싸워야 하는 것이다.
현재에 충실하여 오늘 할 일에 집중하고 있지만 더 먼 미래상에 고취된다.
어떤 사건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그것이 현재 코앞에서 우리를 위협하느냐 아니면 과거의 일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변하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다.
고통 자체를 바라보기 보다는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상기시켜주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혼자 싸워이기는 것이 아니라 의사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싸워야 한다. 그 극심한 고통을 느낄 때 그 안에서 함께 싸우시는 하나님을 가까이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악한 것을 주실 수 없는 분이다. 고통의 순간에 잊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성품이다. 떄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선하신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만으로도 순종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결핍, 좌절, 상실, 승화, 애도. 쉽지 않은 개념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좌절이라는 용어를 파괴적 반응을 의미하고, 상실을 창조적인 반응을 의미한다. 파괴적 행동과 창조적인 행동 중에서 창조성을 택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며 애도 즉 내적 성숙의 전체적 과정이 필요하다.
승화는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과 관계가 있다. 고통의 과정을 가면서 알아야 할 아니 이해해야 할 단어들이다. 결핍을 느끼고 좌절을 하고 상실감을 느끼는 과정 속에서 그것을 애도하고 승화시키는 작업. 고통의 시간 속에서 충분히 애도하지 못했을 때 결국 어느 순간에 터지는 것을 느낀다. 생각보다 “괜찮다.”는 말로 자신의 감정을 덮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외면하고 싶어서 직면하는 것이 더 두려워서 고통스러운 부분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빼앗겼을 때 나는 가장 먼저 나보다도 상대방이 먼저 이해가 된다. 사실 그 프로세스는 나 스스로를 너무 아프게 한다. 이해가 가면 더 이상 블레임할 수 없게 되고 그 결과 가장 중요한 나라는 사람은 스스로 지키지 못하게 된다. 내가 아팠던 감정은 자연스럽게 묻혀버린다. 최근에 깨달은 것은 내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 “괜찮아.”라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굉장히 자주 내 감정을 스스로 외면시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알고 조금씩 바꾸려고 하지만 사실 내 안에 있는 감정을 솔직하게 끄집어낼 때 생각보다 아프다는 것을 알기에 여전히 두렵게 느껴진다. 책에서 이야기해주듯 수용은 우리 성장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나도 두렵지만 한걸음씩 연습하고 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실 수 있는 것이 있다.
받아들이는 일을 가능하게 하고 우리를 그 과정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그분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분노는 표현해야 한다. 분노를 터뜨린 후에야 진정한 조화, 신앙의 조화가 일어난다.
극심한 고통을 느꼈을 때 단지 고통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야’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 무엇보다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완전히 참여하는 것이자 현 순간을 살아내는 것이다.
수용하고 또 내가 도전해야 할 것이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친한 동생이 “언니 차라리 화를 내.”라는 말을 몇 번 했었다.
나는 화내는 방법을 잘 모른다.(착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표출이 된다.) 그래서 마음에 분노가 이르다가도 삭이고 절충된 표현으로 그친다. 화내는 것 대신 스스로를 자학하거나 토라진 듯 보여 오히려 우습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 알지만 생각보다 이 연습이 쉽지는 않다. 매 순간이 고통은 아니지만 삶의 순간마다 내가 꼭 반응해야 할 일은 늘 있다. 평소에 직면하지 못한다면 나는 극심한 고통이 왔을 때 더욱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
내 용기는 용기 있는 사람들과 접촉할 때 되살아난다.
용기는 가르쳐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염시켜야 한다.
나는 이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용기를 전염시키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들을 붙여주시는 것은 정말 늘 신기하면서 감사한 일이다.
위에서 말한 친한 동생이 그런 용기를 전염시켜준다. 상대방이 내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에 용기 있는 사람이기에 나도 그 상대에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호작용으로 나도 그 동생의 감정을 받아들일 용기가 생긴다. 하나님의 이런 원리는 늘 마음 따뜻해지는 부분이다. 축복을 주실 때도 사람을 통해서 축복하는 사람을 축복해주시는 따뜻한 방법을 사용하신다.
용기가 필요한 이유는 절망하기보다 용감하게 맞설 때 고통이 훨씬 덜하기 때문이다.
고통이 훨씬 덜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 첫 발을 내딛는 것에 두려움을 이긴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책에서 말하듯 시련이 그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창조성의 기회를 준다. 유익하다는 것을 알지만 늘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상실은 창조성이 새롭게 전개되는 기회 일 수 있다.
서커스에서 공중 그네를 타는 사람들은 다른 그네를 잡기 위해 잡고 있던 것을 놓아야 한다.
창조성은 우리 삶에 더 자유롭고 더 사려 깊고 더 독창적이고 더 생산적인 새로운 추진력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인생의 모든 시련이 밭을 가는 것처럼 씨를 뿌릴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시련만이 신체적, 정신적 습관의 굳은 껍질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누구나 상실을 경험하고 또 고통의 순간을 경험한다. 지나고 나면 유익했다고 고백하지만 오는 것은 늘 달갑지 않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고통의 순간에 기대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고통가운데 있지 않아도 내 자원을 만드는 것에 힘쓰기 시작했다. 꼭 상실과 고통의 순간이 아니어도 삶에서 작은 일들을 넘어갈 때 나를 알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고통과 상실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이전에 나에 대해서 알고 나의 고통에 대한 반응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여서 참 좋았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대할 때 이 많은 지식과 좋은 말들이 필요하기보다는 결국은 하나님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먼저 살피고 하나님과의 교재를 통해서 충분히 채워져야 함을 느낀다.